CRITIC

오연진의 작업을 훑어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리처드 세라의 초기 작업이었다. 그간 오연진의 작업이 주로 사진성과 관련해 논의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나의 이런 연상은 상당히 의외거나 엉뚱하게 보일 테다. 오연진과 세라를 겹쳐보게 만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눈에 띈 부분은 과정이 곧 결과가 되는 강한 수행성이다. 녹인 납을 벽과 바닥이 만나는 모서리에 던져 굳은 모양을 그대로 떼어낸 세라의 ≪Splash Piece: Casting≫(1969)처럼, 현상액을 뿌리고 노광을 주는 과정이 고스란히 이미지에 남은 오연진의 ≪Pastry≫(2022)나 ≪Tweed≫(2022) 연작은 중첩을 함유한 제목 그대로 반복된 수행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표로 간직한다. 비단 이 작업 외에도 오연진의 모든 작업은 노광과 현상, 인화라는 암실의 프로세스를 노동집약적으로 변주해 제작 공정을 투명하게 드러내기에, 과정(process)이 결과물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결과물이 물리적으로 변화하지 않더라도 오연진의 작업을 프로세스 아트로 읽을 수 있으며, 사진의 지표성이 대상이 아니라 과정에 적용된 독특한 사진 작업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재료의 속성과 이미지의 구성 원리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지점 또한 세라와 친연성이 있다. 철판을 계속 쌓다가 수직성이 무너지기 직전에 적층을 멈추는 세라의 ≪Stacked Steel Slabs≫(1969)는 조각의 구성이 끝나는 지점이 무게 중심이라는 조각의 내부에서 결정된다. 철판의 무게와 모양이 작업의 구조를 결정하듯, 오연진의 ≪Solar Breath≫(2019)는 이미지가 인쇄된 반투명한 시폰 천 위에 아크릴 물감을 얼마나 칠하느냐에 따라 투광도가 달라져 결과물의 색과 밝기가 좌우된다. 필름 역할을 하는 물질의 속성, 초점 거리, 노광 시간, 조리개의 열린 정도, 현상액이 묻는 시간 등 이미지를 생산하는 재료 및 장치의 광화학적 속성이 그대로 이미지의 색과 형상에 반영되는 정직함은 납판을 말고 접고 떨어뜨리는 행위를 직설적으로 수행하는 세라의 작업과 묘하게 연결된다. 마지막 이유는 출발 매체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전통적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경계를 실험하는 태도의 유사성이다. 세라는 ≪Hand Catching Lead≫(1968)를 비롯해 여러 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이는 조각의 공간성에 시간성을 부가해 새로운 시공간 연속체에서 조각의 지평을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오연진 역시 사진과 회화, 사진과 영상의 경계에서 늘 진동해왔다. 사진에서 회화로, 다시 사진으로 자리바꿈을 계속하는 ≪Solar Breath≫는 사진을 본떠 그리거나,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다시 찍는 등 평면 매체 사이를 넘나들며 회화(painting)가 아닌 그림(picture)을 실험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떠올리게 한다. ≪Anorthoscope≫(2020)는 필름이 움직이고, 피사체가 움직이며, 카메라가 움직이는 마야 데런의 영화 ≪The Very Eye of Night≫(1958)에서 영감을 얻어 끝없이 변화하는 이미지의 움직임을 반복적 시퀀스와 제3의 이미지 생산으로 구현했다.

2024년 OCI미술관 개인전 《이것은 의견이 아니다. 아니, 의견인가?》의 출품작 역시 전술한 속성에서 예외가 아니다. 아크릴 위에 홀로그램 필름을 얹고 그 위에 구겨진 비닐을 올린 후 비닐 모양대로 레진을 부어 굳힌 ≪Self-referential Film (Molted)≫(2024) 연작은 작가가 비닐을 구긴 정도가 그대로 동결된 수행성을 지닌다. 조각에 가까울 정도로 튀어나온 작업의 두께는 평면과 입체의 경계에서 애매하게 흔들리며 사진 매체의 외연을 넓힌다. 한편 투명한 슬라임 위에 줄무늬 패턴의 필름을 얹고 두세 번 중복 노광을 통해 추상적 형상을 얻은 ≪Lean≫(2024) 연작 또한 재료의 물성이 이미지와 직결되며 매체의 경계를 흔든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슬라임의 불균질한 표면과 출렁이는 물성은 줄무늬 패턴을 통과하는 빛에 무아레(moire) 현상을 유발하고, 이는 크로모제닉 프린트에 회화적 변주를 부여한다. 여기서 외견상 부조에 가까운 ≪Self-referential Film (Molted)≫에 굳이 ‘사진’이라는 호명을 한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내 작업을 사진으로 인지하면서도 사진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에 포함되고 싶지는 않은데, 이러한 태도가 다시 사진적인 것으로 독해되기를 바란다”는 (오연진 작가노트, 「사진, 매체, 조건, 클리셰」, 2018.)2018년의 작가 노트가 매체 간 혼성과 확장을 지향하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신작은 움직이는 필름(film in motion)에 대한 근자의 탐구의 연장이다. 여기서 움직이는 필름은 일반적인 영상(moving image)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연진의 움직임(moving)은 필름의 물리적 운동이 아니라 비고정성을 뜻한다. 카메라를 통한 사진에서 네거티브 필름은 항상 고정된 상을 전제로 했다. 비록 현상 및 인화 과정에서 미세한 차이가 발생하더라도 원론적으로 네거티브는 이미 고정된 것이었다.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는 오연진의 작업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필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흐르는 현상액 자체가 필름이 되기도 하고(≪Pastry≫), 밀착 인화를 통해 대상을 필름으로 만들기도 한다(≪Contact≫(2017)). 2020년 이후 작가는 액체로서의 필름에 주목했다. 신작의 토대가 되는 ≪Lamella≫(2020), ≪Object-Through≫(2020~), ≪Self-referential Film≫(2020~)은 모두 2020년에 시작되었다. ≪Lamella≫는 금속 프레임에 비누막을 입히고 빛을 투과해 찰나적으로 산란하는 액체로서의 필름(비누막)을 찍은 카메라 사진이고, ≪Object-Through≫는 인화지 위에 투명판을 얹어 물을 떨어뜨리거나 확대기 안에 아크릴로 작은 수조를 만들고 그 위에 슬라임을 올려 액체 혹은 겔을 필름으로 삼은 카메라 없는 사진이다. ≪Lean≫은 배경 이미지가 없는 흑백 사진인 ≪Object-Through≫에 줄무늬 패턴을 가미하고 여러 색깔의 빛으로 중첩 노광해 색감을 부여했다. 고정되지 않고 출렁이는 이 유동체 필름은 이중성을 지닌다. 이들은 빛을 투과해 피사체(줄무늬 패턴)를 보여주는 동시에 스스로 보이는 대상이 된다. 자신을 투과시켜 피사체를 보여주는(looking through) 투명한 창으로서의 필름과 스스로 피사체가 되어 바라봄의 대상이 되는(looking at) 사물로서의 필름은 이렇게 만난다. (오연진 작가노트, 「물, 리퀴드, 비눗방울」, 2020) 한편, ≪Self-referential Film≫ 연작은 신작 ≪Self-referential Film (Molted)≫의 직접적 선례다. 기본 원리는 흡사하다. ≪Self-referential Film≫이 캔버스 위에 PVC 필름을 입히고 레진을 뿌리거나 바르는 방식이었다면, ≪Self-referential Film (Molted)≫은 홀로그램 PVC 필름 위에 구겨진 비닐이 한 겹 추가되고 그 모양을 레진으로 고정하는 구조다. 이런 제작 방식의 차이로 전작은 레진이 부분적으로 녹아내리거나 흐르는 표면을 지니고 있어 ‘용융(Melting)’이라는 부제가 붙은 경우가 많고, 신작은 각진 비닐의 형태가 그대로 살아 있어 갑각류의 껍질을 연상시키기에 ‘탈피(Molted)’라는 부제가 붙었다. ≪Self-referential Film≫의 개념 또한 필름에 대한 자의식적 탐색이다. 일반적 사진에서 이미지 뒤에 숨겨져 있는 필름은 전면화해 이미지 앞에 선다. ‘자기 참조적’이라는 제목은 구조물로서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는 자의식적 필름을 가리킨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색을 띠는 움직이는 시각과 겔 상태로 흔들리는 움직이는 필름은 사진의 고정관념에 대한 작가의 문제 제기이자 답변이다. 네거티브(필름)가 움직인다면, 네거티브가 전면에 등장한다면, 그런 사진은 무엇일까? 오연진은 필름이 사물이 되고 흐르는 제3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이때의 움직이는 시각(vision in motion)은 라즐로 모홀리나기와 달리 물리적인 운동을 필연적으로 포함하지 않는다. 오연진이 생각하는 움직임은 조건이 고정되지 않은 상태다. (오연진 작가노트, 「가능성으로서의 무빙」, 2020.) 이는 반복이 동일성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생산하는 변화의 상태를 뜻한다. 필름의 매질, 노광 시간과 횟수, 빛의 강도, 현상액의 투여량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오연진의 카메라 없는 사진은 모든 판본이 원본이지만 동시에 하나가 아닌 여럿이어야만 의미가 있다. 조건이 변화하면서 발생하는 변주들은 반복을 통해서만 발생하고, 복수여야 변화 가능성이 드러난다. 오연진의 모든 작업이 연작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건이 움직이는 세계는 “수천 개의 평행 우주처럼 동어반복적인 동시에 조금씩 차이를 만들어 내며 어긋나” (오연진 작가노트, 「사진, 매체, 조건, 클리셰」, 2018.)있는 새로운 사진적 시공간이다. 이런 세계는 베르그손의 세계와도 같다. 베르그손에게 세계는 연속하는 운동 자체이고, 이 운동이 특정한 순간성으로 응고되는 것이 이미지다. 우주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시공간 연속체이고, 인간이 이 연속적 파동을 순간적으로 지각할 때 이미지가 발생한다. (앙리 베르그손(박종원 역), 『물질과 기억』 (아카넷, 2005), pp. 314-349.) 스케일, 노광시간, 초점 거리 등의 암실 조건을 순간순간 지정해 우연과 의도가 뒤엉켜 도출되는 오연진의 이미지는 생산될 수 있는 가능한 수많은 잠재태들이 특정한 순간을 만나 현실화된 고유한(unique) 결과다. 그 각각의 이미지는 특정한 시간, 특정한 온습도, 특정한 작가의 상태, 특정한 물질이 맺는 관계로 조성된 독특한(singular) 개체다. 오연진의 작업에서 개별 이미지와 연작의 관계, 각 연작과 작업 전체의 관계, 하나의 매체와 다른 매체 사이의 관계는 베르그손적 이미지와 운동의 관계에 조응한다. 움직임의 연속 스펙트럼 속에서 각 조건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결과값이 바로 오연진의 이미지다. 그것은 항시적인 운동 속에 있는 일시적 정지 이미지다. 그 속에서는 필름도, 이미지도, 조건도, 매체도 늘 움직인다.

 

Looking through Yeonjin Oh’s work, the first thing that came to my mind was the early works of Richard Serra. Given that her work has primarily been discussed in relation to photography, my association may seem quite unexpected or unrelated. There are several reasons that made me juxtapose Yeonjin Oh with Richard Serra. Firstly, it is the strong performativity where the process itself becomes the result. Similar to Serra’s Splash Piece: Casting (1969), which captures the solidified shape formed by throwing molten lead against a corner where the wall and floor meet, Oh’s Tweed (2022) and Pastry (2022) series, whose images are engraved with the process of spraying developer and exposure, retain the traces of repetitive performances as an index—just like their titles connoting layers. Besides these works, as all of her works involve labor-intensive variations of the darkroom processes including exposure, development, and printing, the production procedures are transparently revealed, compressing the process into the result. In this sense, even if the result does not change physically, her works can be read as process art, a unique photographic work where the indexicality of photography is not applied to the subject but to the process. 

On the other hand, her work also shares an affinity with Serra’s in that the material properties and the principles of image compositions are clearly manifested. In Stacked Steel Slabs (1969), where Serra piled up steel slabs until they were on the verge of losing their verticality, the moment when the sculptural composition becomes complete is determined by the center of gravity, namely the inside of the sculpture. In Solar Breath (2019) by Oh, just as the weight and shape of steel plates determine the structure of Serra’s work, the amount of acrylic paint applied on the translucent chiffon fabric printed with images controls the light transmission, and consequently the colors and brightness of the work. The honesty in reflecting the photochemical qualities of image-producing materials and apparatus—including the nature of materials acting as film, focal length, exposure time, aperture openings, and the duration for which the developer is applied—directly onto the image’s color and form strangely connects to Serra’s literal execution of rolling, folding, and dropping lead plates. The final reason for their similarity lies in their shared attitudes of refusing to remain within traditional categories and experimenting with boundaries, all while staying rooted in their initial mediums. Serra made a number of films, including Hand Catching Lead (1968), which was an attempt to add temporality to the spatiality of sculpture, thereby expanding the horizon of sculpture into a new spatiotemporal continuum. Likewise, Yeonjin Oh has always oscillated between photography and painting, and between photography and video. Moving from photography to painting, and back to photography, Solar Breath is reminiscent of Gerhard Richter, who experiments with picture instead of painting, freely hovering between flat mediums by painting after photographs, painting on photographs, or taking pictures of such paintings. Inspired by Maya Deren’s film The Very Eye of Night (1958), where the film, subject, and camera are in motion, Anorthoscope (2020) embodies the motion of images in constant change through repetitive sequences and the production of a third image.

The works in her solo exhibition “This Is Not an Opinion, or Is It?” (2024) at the OCI Museum of Art are no exception to the aforementioned aspects. By laying a holographic film on an acrylic sheet, placing crumpled plastic on top, and then hardening it with resin, the Self-referential Film (Molted) (2024) series captures the performativity where the degree to which the artist crumpled the plastic is frozen in place. The thickness of the work, protruding almost like a sculpture, expands the extension of the photographic medium by ambiguously swaying across the boundaries between the two- and three-dimensional. Meanwhile, the Lean (2024) series, whose abstract form is achieved through double or triple exposures of stripe-patterned films on clear slime, is similar in that its materiality is directly related to the image, blurring the boundaries of the medium. The uneven surface and fluid-like materiality of the slime create a moiré pattern in the light passing through the stripe, providing the chromogenic print with painterly variations. There is a reason why seemingly relief-like Self-referential Film (Molted) is still labeled as “photography.” The artist statement from 2018 stated “While I perceive my works as photography, I do not want them to be incorporated into the traditional category of photography, wishing this attitude is interpreted as photographic again” remains valid today when the hybrid and expansion across mediums are sought.

The new body of works is an extension of her recent research on film in motion. Here, film in motion does not refer to typical moving images. Yeonjin Oh’s concept of moving signifies not the physical movement of film, but its non-fixity. In photographs taken with a camera, the negative film always presupposed a fixed image. Even if minor changes occurred during the development and printing process, the negative film had already been fixed technically. In the work of Oh, who does not use a camera, traditional film in the conventional sense is nonexistent. The flowing developer itself can become her film (as in Pastry), or the subject is transformed into the film through contact printing (as in Contact (2017)). Since 2020, the artist has focused on film as liquid. Lamella (2020), Object-Through (2020-), and Self-referential Film (2020-), which are foundational to her new works, all started in 2020. Lamella is a photograph taken with a camera, capturing transient light scattering through a soap film formed around a metal frame, presenting the (soap) film as liquid, whereas Object-Through is a cameraless photograph where liquid or gel serves as film, either by dropping water on a transparent plate laid on photographic paper or by placing slime on a small acrylic water tank in an enlarger. In Lean, she added striped patterns to Object-Through, the black-and-white photograph without any background image, and infused it with colors through multiple exposures with lights of various hues. These fluid films, sloshing without being fixed, possess a duality: they not only reveal the subject matter (the striped pattern) by allowing light to pass through but also become visible subjects themselves. It is how film as a transparent window, which reveals the subject by being looked through, and film as an object, which becomes the subject itself to be looked at, converge. On the other hand, the Self-referential Film series is a direct precursor to the new Self-referential Film (Molted) series. The basic principle is similar. While in the Self-referential Film series, a PVC film is mounted on canvas and resin is scattered or applied, in the structure of the Self-referential Film (Molted) series, a layer of crumpled plastic is added onto a holographic PVC film, with its shape fixed by resin. Because of the difference in the production methods, the previous work, with resin partially running down or flowing on the surface, often has the subtitle “Melting,” whereas the new work, with its preserved angular plastic forms reminiscent of crustacean shells, is subtitled “Molted.” The concept of Self-referential Film is also a self-conscious exploration of film. The film is brought to the forefront and stands before the image, unlike in general photographs where it is hidden behind the image. The title “Self-referential” indicates the self-conscious film that reveals its own existence as a structure.

Vision in motion, tinged with different colors depending on viewing angles, and film in motion, wobbling in a gel state, represent the artist’s question and answer to the stereotypes of photography: If the negative (film) were in motion or appeared at the forefront, what would such a photograph be? Yeonjin Oh presents her perspective through the third image, where film becomes an object and flows. Vision in motion in this sense does not necessarily involve physical movement, unlike the concept of László Moholy-Nagy. For Yeonjin Oh, moving signifies a state where conditions are not fixed —a state of flux where repetition generates differences, not identity. Her cameraless photographs necessarily vary according to the medium of film, exposure duration and frequency, light intensity, and the amount of developer applied, which makes every print original, yet collectively meaningful as part of a whole rather than as a single entity. The variations that arise when conditions change emerge only through repetition, and it is in plurality that the potential for change is revealed. This is why all of her works are series. The world of conditions in motion is a new photographic spacetime that is “tautological like thousands of parallel universes, while simultaneously creating slight differences and dissonances.” This world is akin to that of Henri Bergson. For Bergson, the world is a successive movement itself, and images are such movement coagulated into specific instantaneity. The universe is not something fixed but a spatiotemporal continuum in motion, and images arise when we momentarily perceive this successive vibration. Emerging from each adjustment of the darkroom conditions—such as scale, exposure time, focal length, etc.—and intertwining chance with intention, Yeonjin Oh’s images are unique outcomes realized when numerous latent potentialities for development meet specific moments. Every image is a singular entity formed through the relationships between specific time, specific temperature and humidity, specific state of the artist, and specific materials. In her practice, the relationship between an individual image and series, between each series and the whole body of work, and between one medium and another corresponds to the Bergsonian relationship between images and movement. Yeonjin Oh’s image is the instantaneous result of configuring each condition within the continuous spectrum of moving: an image momentarily paused within the perpetual movement. Within this image, the film, the image itself, the condition, and the medium are all in constant motion.

오연진이 사유하는 작업의 과정은 그가 종종 언급하는 마야 데렌을 떠올리게 한다. 마야 데렌은 전방위로 활동했던 아방가르드 예술가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영화란 세상과 고립된 예술 혹은 유희가 아니었다. 외려 데렌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 작업을 또 다른 하나의 리얼리티로 탄생시켰다. 그래서 데렌의 영화는 현실에서보다 더욱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이미지의 산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오연진의 작업과정에 있어서도 데렌이 하나의 또다른 ‘인위적 리얼리티’를 창조하듯 사진 매체를 통한 실험과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로 그만의 인위적 리얼리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오연진의 사진 작업은 추상회화처럼 보이거나 또는 캔버스를 수십 개의 동일한 크기로 맞추어 제작한 대형회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람객이 전시공간에 들어서면서 오연진의 작업이 설치된 벽면까지 걸어 가다 보면 눈앞에 마주한 매체는 회화가 아닌 분명한 사진이지만 말이다. 그는 거대한 이미지들이 소용돌이치는 사진으로 어떠한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일까. 오연진의 작업과 실험, 시스템과 구조를 새롭게 변주해보는 사유를 통해 마야 데렌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오연진은 사진의 기술력과 그가 실험하는 이미지의 우연성 내지는 충동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움직임을 늘 염두에 두며 작업하는 작가인 듯 하다. 나는 그의 작업에서 이렇게 특별한 균형감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발견’은 마치 디지털 공간에서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무한대로 확장하여 유영하는 것처럼,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기억과 관심사를 다시 디지털 매체를 통해 간접 소환하는 과정의 흐름에 함께 존재하는 것 같다. 이미지를 창출해내는 무한대의 기약 없는 시간과 공간의 작업을 시작하는 순간에서 원하는 그 '무엇’이 변주되어 눈앞에 가시화 되는 순간까지, 오연진은 그렇게 현실의 공간에서도 지속적인 실험을 지체하지 않는다.

오연진이 작품을 통해 현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들은 사진의 속성과 디지털 이미지 혹은 영화의 합성 이미지처럼 각각의 매체에서 다루어지는 기술적인 요소들이 중첩되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것은 오연진이 우연을 의도하여 탄생시킨 ‘인위적 리얼리티’처럼 실험성이 돋보인다. 이번 개인전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들의 제목이 그러하듯, 우리가 보편적으로 상상하는 자연과 우주, 생태와 대기의 현상들을 오연진은 사뭇 대조적으로 시점을 전환하여 역설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작품명을 확정한 흥미로운 시도가 돋보인다. 이러한 시도 또한 다분히 오연진이 향후 지속적으로 추구할 작업의 과정이자 즐거운 사유가 될 것이다. 

방금 위에서 언급한 오연진 개인전의 출품작 제목들을 살펴보자. ‹그물유영›, ‹상승하는 낙화›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특별한 의구심을 품지 않고 수용하는 자연현상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연진은 이미지를 인화하고 위와 같은 작품 제목을 명명했다. 그물은 홀로 떠다닐 수 없는 오브제이고 떨어지는 꽃도 아래로 수직 낙하를 할지언정 상승한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기대할 수 없는 풍경에 가깝다. ‹대기의 색›에서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색깔이 아닌, 초록, 파랑, 검정, 오렌지 빛처럼 보이는 다양한 색감의 어우러짐을 두드러지게 본다. ‹셀 수 없는 봄›에서도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연속적인 이 미지들이 우리의 시선을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며, ‘계절을 셀 수 없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오연진의 사진 이미지는 실제로 만나면 작품 제목처럼 아련하다거나 낭만적이라거나 하는 느낌 보다는 하나의 덩어리이자 이미지로 크게 다가온다. 아울러 드는 생각은, 마야 데렌이 그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기법처럼 오연진이 길어 올린 이미지들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은 어떤 변주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그가 보여주는 사진과 이미지들은 늘 유영하면서 힘있는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사이’, 그 절대값은 희미하거나 알 수 없지만, 오연진이 작업을 위해 설정해놓은 최소한의 조건으로 그녀는 또 다른 세계와 차원의 ‘사이’에 주목하며 변화와 역동성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다시 움직이고자 작업하는 작가이다.

오연진은 그의 작업실에 있는 분리된 공간, 암실에서 카메라 필름이 가진 속성을 연구하며 필름의 역할-유동성-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작가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화가 가능한 필름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사진이 지니고 있는 개성 사이에서 필름이 할 수 있는 연결 통로로서의 가능성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네거티브 필름과 오연진이 만들어내는 컬러 이미지의 사진 사이를 유연하게 연결하는 '인터페이스’가 디지털 공간의 유튜브처럼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 그는 고민한다. 오연진의 작업 과정은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동시대 미술에서 뉴미디어라고 명명하는 매체가 나타내는 특성을 많이 닮아있다.

사진을 주요 매체로 작업하는 작가가 사진이 가진 양가적인 특성에 매료되어 치열하게 간극을 build-up(구축) 하고 있지만 동시에 오연진은 우리의 일상에 이미 자웅동체(雌雄同體)가 되어버린 디지털 기기가 생산해내는 이미지 뒤의 숨은 이야기, 시간과 공간의 흐름, 자연과 우주의 구조와 유연한 흐름에도 주목한다. 다시 마야 데렌으로 돌아가 보자면 그가 ‘발견’과 ‘발명’ 으로 정의되는 촬영과 편집 기술을 시와 춤과 건축과 음악에 병합시켜 그녀의 영화 속에 ‘인위적 리얼리티’ 를 만든 것처럼, 오연진의 사진 매체의 본질에 대한 고민과 실험, 이미지—작가의 사유를 압축해서 상상의 여지를 크게 ‘간극’으로 만든—우리의 오프라인 시공간과 차별화될 수 있는 지점이야말로 그의 작업이 가지는 미학적 특징이 아닐까. 그의 또 다른 신작 ‹페스타›, ‹세계›, ‹지도›, ‹다목적 초원›에서도 우리는 오연진의 이미지에 대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제목으로 유추하자면 이 세 가지 제목을 가진 작품을 통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가, 무엇을’ 이라고 하는 해당사항을 모두 질문해야만 할 것 같다. 오연진이 상상하고 의도했던 시간과 공간은 이 작품에서 어떻게 흐르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바다, 바위, 나무, 숲, 초원 등으로 상상 가능한 자연, 그리고 그곳에서는 어떠한 관계가 형성되고 무슨 대화가 있는 공간일까? 이러한 시공간에서 우리는 어떤 심리적 상태를 경험하게 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사진에서 당연시되었던 피사체가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은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다분히 연속성이 결여 되어 보이는 이미지들은 마치 영상의 개념으로 보자면 분절된 장면들처럼 보인다. 하나의 단위로 이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연진의 개별 작품의 이미지들도 압축과 확장의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하나가 되기’는 어려운 독립성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럽에서 뤼미에르 형제의 활동사진이 발명되기 이전, 19세기 ‘프리-시네마(Pre-Cinema) 시대에 이미 움직이는 그림을 보여주는 매우 다양한 애니메이션 장치들이 발명되어 사람 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사람들은 ‘철학적 장난감(Philosophical Toys)’이라 고 불렀다고 한다. 이 기계장치는 빛과 사물의 운동 원리 및 시각 잔상효과, 그리고 가현 운동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이미지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광학 장난감(Optical Toy)’ 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도 페나키스티코프는 벨기에 물리학자 조셉 플라토와 오스트리아 수학자이자 발명가인 스탬퍼에 의해 1832년 발명된 원판형 시각 놀이 애니메이션 장치로서, 움직이는 그림이 그려진 원판을 회전시키고, 그림 사이의 ‘틈’을 통해 반대편의 거울에 비쳐서 나타나는 움직임을 보는 장치이다. 오연진의 작업과정에 있어서의 실험, 유기적 구조를 조망하면서 분절과 전체를 아우르는 직조방식을 통해 ‘진실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를 생각한다. 오연진의 작업을 논하며 사진에서부터 뉴미디어, 심지어 애니메이션의 탄생까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그의 평면작업을 단순히 ‘평면’이라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개인전 제목이 《Tweed》(트위드, 혼성직물)인 것처럼, 오연진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이미지는 가로세로가 직조되어 평면이 나오지만 그것이 또한 복합적인 구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다른 공정을 반복해야 하는 트위드 직물처럼, 은밀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특유의 ‘움직이는’ 조형언어를 전하고 있다. 

시간은 앞뒤로 흐르고, 때로는 멈추고, 지연되며, 반복된다. 오연진은 개인전 《The Very Eye of Night》에서 이미지의 시간 축에 상수값처럼 달라붙은 수사의 교차와 비틀기를 다룬다. 특히 그는 과거의 급진적인 광학 실험이나 이론적 발견을 현재의 시점으로 재소환하고 변용하며, 정지한(혹은 그렇다고 가정한) 형상의 움직임과 그 조건을 둘러싼 질문에 천착한다.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역사적 참조들 사이에서 이미지에 투사되는 시간의 흐름을 상상해본다. 무엇보다 예술로 범주화된 사진에 관한 비평 선례들의 비호 아래 있던 여러 명제(아날로그 사진의 진실성, 디지털 사진의 납작함, 무한 복제와 편집 등)가 무용지물이 된 시점에서, 작가 스스로 매체 이후(post-)의 존속 가능성을 써 내려가고 이를 다시 작품 안으로 소급하는 방식이 작업 전개의 핵심이 된다.

그는 본 전시에서 ‘필름(막)’, ‘비눗방울’, ‘유체’, ‘아노토스코프’, ‘밤의 눈’ 등의 단어를 나열하고 있다. 이는 무용과 영화 분야에서 전위적으로 활동했던 마야 데렌(Maya Deren)과 벨기에의 물리학자였던 조셉 플라토(Joseph Plateau)의 창의적 실험과 발견으로부터 도출된 키워드이다. 그는 필름(혹은 막)이라는 지지체의 운동 가능성을 전제로 앞선 단어들 사이의 개념적 프로토콜을 재구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피사체의 연속 기록이나 렌즈의 물리적 이동에 따른 운동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작가는 틱톡(TikTok)과 같은 무빙 이미지 공유 플랫폼에서 무한히 증식하는 밈들의 루프는 예외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동작의 조건이 이미 메트로놈의 기계적 반복처럼 고정값으로 확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를 ‘무빙’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입구와 출구가 없는 이미지의 무의미한 작용/반작용은 이미 결론 내려진 것, 말하자면 납작한 서사이자 고정된 시간을 표상하는 것이다. 대신 그에게 시간성을 담보하는 움직임이란 기존에 이미지가 실제로 존재하기 위한 준거가 되는 매개 변수가 언제든지 ‘무빙’할 수 있는 잠재 에너지를 확보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오연진의 작업에서 다루어지는 시간과 움직임은 이미지의 표피에서 성급히 성취되기보다, 동적 변화를 암시하는 형태로 파생된다.

다시 그가 제시한 단어들로 돌아가 보자. 〈Anorthoscope〉(2020)는 데렌의 생전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밤의 눈(The Very Eye of Night)〉(1958)의 스틸컷과 작가가 3D 프로그램으로 만든 물의 관념적 이미지로 구성된다. 작가는 데렌의 댄스 필름이 강조하는 무용과 영화 간의 혼종성, 네거티브 필름 속 무용수의 바디스케이프와 포지티브 필름 위 하얀 별무리의 모호한 이접 속에서 ‘무빙’의 가능성을 본다. 이 초현실적인 영상은 단일한 시점의 장면을 상영한다기보다, 마치 안무가를 따라 여러 개의 조각난 시간과 공간에서의 카메라 워크가 덧씌워진 듯한 기묘한 느낌을 준다. 시간 축을 따라 흐르는 가시화된 움직임(춤의 상영) 속에서 비가시적인 영역의 또 다른 운동성(필름 자체가 움직이고 있다는 상상)을 감각하게 하는 것이다. 데렌의 작품이 품고 있는 두 운동 간의 입체적인 크로스 오버는 전시장에서 열 장의 사진과 그 사진의 전제 조건이 되는 열 개의 피사체-프레임의 나란한 배치로 전환되며, 19세기 초 플라토가 발명한 광학 장난감인 ‘아노토스코프’*라는 이름으로 명명된다. 작가는 관람자가 두 갈래로 길게 늘어선 이미지의 연쇄 사이에서 아노토스코프의 작동 원리와 〈밤의 눈〉의 연출 효과가 상징하는 가상의 운동을 경험해보기를 원했던 것일까?

작가는 아노토스코프를 고안했던 플라토가 비눗방울 막의 형성 원리를 법칙화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비누 막과 데렌의 〈밤의 눈〉 사이의 광학적 상관관계를 더욱 파고든다. 〈Lamella〉(2020)는 얇은 기하학 형태의 구조물에 달라붙은 비눗방울을 찍은 연작 사진이다. 작가는 거품을 렌즈를 통해 순간적으로 포착된 피사체이자 곧 부서질 화면 위의 장막으로,  투명한 듯하지만 표면에 일렁이는 빛깔과 패턴을 가진 변덕스러운 필름으로서 인식한다. 거품은 액체가 표면장력을 확대하며 일시적으로 서로의 경계 면을 공유하는 순간에 납작하거나 볼록하게 나타났다가 이내 터져버리는, 존재하지만 거의 보이지 않는 연약한 것이다. 그러나 라멜라는 그의 사진 속에서 서로 겹쳐지고 뒤틀리는 찰나에 데렌의 영상 속 안무가처럼 극적인 구조를 만들어낸다. 비눗방울의 막과 표류하는 신체의 동작이 담긴 무빙 이미지는 서로 다른 지지체의 표면에 머무는 상(象)이면서도 시간에 따른 재현 구조의 변화 잠재력을 표상하는 무빙의 주체로서, 오연진의 작업 위에서 슬며시 겹쳐진다.  

노동집약적인 인화 과정을 거쳐 그 속에서 생성되는 변수들을 그대로 노출하는 작업의 외적 특성은 자칫 화학적, 물리적 차원의 다양한 효과를 살펴보는 것에 관람자의 경험을 한정 시킬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할 만큼 매혹적인 조형 언어를 갖추고 있으므로).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시각적 지표는 고정된 이미지의 표면적 상태를 바라보는 관습적 인식, 즉 무빙 이미지는 언제나 움직이고 정지 이미지는 항상 멈춰있는 것이라는 제한적 사고에 대한 의심이자 비판적 심문의 태도이다. 작가는 데렌과 플라토가 보여준 광학적 시도를 자신의 언어로 상충, 접합, 편집해가며 조금씩 사진의 시간성을 새롭게 써내려간다. 따라서 오연진의 작업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근미래 사이의 유동하는 시간을 내재한 일시적 양태로서 머무르고, 곧 ‘무빙’할 것이다. 진실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해답을 찾아서. 

* 아노토스코프는 조셉 플라토가 고안한 무빙 이미지 장치로, 고정 이미지를 회전시켜 제3의 정지된 형상을 얻어내는 장치이다. 


Time is a relativistic space in which its movement can flow either forwards or backwards, and can even have the ability to stop or repeat itself. Yeonjin Oh addresses the concept of time as an illusion; in her solo exhibition, 《The Very Eye of Night》, she explores the nature behind the rhetoric of distortion and attempts to marry quantum mechanics with general relativity in relation to the constant value of the temporal axis. In particular, she recalls the theoretical discoveries made in the past alongside new radical optical experiments and re articulates these findings from a modern day perspective. In doing so, Oh is able to delve into the movement of these professedly still images and challenge its surroundings and essence; she imagines the flow of time projected onto images among seemingly unrelated historical references. Above all, her greatest concerns when approaching her works is considering the matter of sustainability post media constructions. She renders predetermined critical precedents around photography as ‘art’ – which includes the veracity of analogue photograph, the flatness of a digital photograph, and one’s capability to create infinite copies and edits – useless.

The artist enumerates several words like “film,” “bubble,” “fluid,” “Anorthoscope,” and “The Very Eye of Night.” These are the keywords that have been extracted from the creative experiments and discoveries of Maya Deren, the avant-garde dancer and filmmaker, and Joseph Plateau, a Belgian physicist. She reconstructs the conceptual protocol for the forgoing words, assuming the mobility of film as a supporting role. Her main focus is neither on the continuous record of the moving subject nor on the physical movement of the lens. Specifically, she determines that moving images from some social media platforms such as TikTok are ‘unmoving’ due to the fact that these kind of infinitely multiplying loops of memes do not allow for any anomalies, meaning that the very nature of these conditions are already in a fixated state, like a metronome, repeating mechanically. The meaningless action and reaction without a proper entrance or exit are predetermined, thus symbolizing its flat narratives and fixed time. To the artist, temporal movement is defined by the potential energy an image consumes to ‘move’ at any time. Therefore, time and movements from the artist’s works are not taken away from the surface of images, but derived from their implied dynamic changes.

Let us go back to the words she suggests. 〈Anorthoscope〉(2020) is composed of still cuts from 〈The Very Eye of Night〉(1958), which is the swan song of Deren and the conceptual images of water Oh created with 3D programs. Oh sees the possibility of ‘moving’ in the hybridity of dance and film that is epitomized in Deren’s work, and the vague disjunction between the bodyscape of dancers in the negative films and the cluster of white stars in the positive films. Instead of screening the scenes from a single point of view, this surreal video gives a strange feeling that the camera work follows the dancer towards multiple, scattered junctions of time and space. It creates a sense of invisible areas of movement where the film itself is moving beyond the visible realm along the temporal axis – the screening of dancing. In the exhibition, the dimensional crossover between the two movements in Deren’s film is converted to side-by-side arrangements of ten photographs and ten subject-frames prerequisite to those photos, called ‘Anorthoscope,’* which is the name of an optical toy invented by Plateau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In between the two sets of images, the artist might want the viewers to experience the virtual movement generated by the operational principle of Anorthoscope and the visual effect of 《The Very Eye of Night》.

Based on the fact that Plateau, who invented the Anorthoscope, also established the law of formation of bubble film, Oh delves deeper into the optical correlation between bubbles and Deren’s 〈The Very Eye of Night〉. 〈Lamella〉(2020) is a series of photographs of bubbles attached to thin geometrical structures. The artist perceives bubble as a subject captured through lens, a curtain on the screen soon to be scattered, and a changeable film with flickering colors and patterns though seemingly transparent. Bubbles are present at the same time rarely visible in that liquid, increases its surface tension and temporarily shares its border surface to another to be flat or swollen, and then pops. In 〈Lamella〉, however, a dramatic structure occurs at the moment of crossing and distorting like a choreographer in the Deren’s film. The moving images containing bubble’s film and floating body gestures are images on the surface of each supporter, and at the same time they are the agents of moving which demonstrates the potential changes of structures of representation depending on time.

The external aesthetics of the work might limit the viewer’s experience to observing a variety of chemical or physical effects of the work, since the labor-intensive printing process shows the results of variables without any adjustments – and the results do in fact have the kind of attractive formative language. But what the artist actually suggests is a critical assumption on the conventional perception of the appearance of still images or the limited thinking that moving images are always moving and still images are always still. She rewrites the temporality of photographs by contradicting, connecting, and editing the optical attempts that Deren and Plateau have made. Her works will stay for a moment as a temporal status implying past, present and near future, and soon start ‘moving,’ to find an answer to what is really moving.


* Anorthoscope is a moving-image device invented by Joseph Plateau that creates another still figure by spinning still images. 

2019년 12월 26일 홍대입구역 근처의 전시장 두 곳에 들렀다. 오연진의 개인전이 진행 중이었던 ‘전시공간’과 당일이 백종관의 개인전 마지막 날이었던 ‘온수공간’이 그곳이었다. 작은 골목길들을 제하고서 멀리서 보면,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공간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주 우연하게도 두 공간에서 전시되는 작업 역시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형세였다.

한쪽에서는 오연진이 영상 매체를 레퍼런스 삼아 회화와 사진을 다루었고, 반대편에선 백종관이 회화로부터 출발한 문제의식[“다시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가, 파리가 화판 전체의 인위성을 가리키는 이중적인 재현 체계의 공존을 암시함과 동시에 재현의 공간과 관객의 공간을 분리했음을 떠올린다.”]을 영화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둘 모두 화면이라는 개념적 지지체 자체에 대해서 천착하고 있었다.

화면을 바라보는 가장 흔한 방법은 그것을 ‘창’으로 보거나 혹은 ‘틀’로 보는 것이다. ‘창’으로서의 화면이 2D를 3D로 보이게끔 하는 환영적 공간을 완벽하게 구축하고 그 자신을 비가시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틀’로서의 화면은 지지체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며 화면 내부에 특유한 질서를 지향한다. 전자가 전통적 회화의 화면이라면, 후자가 현대적 회화의 화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화면은 ‘창’으로 여겨진다. 실제를 기록하는 비인간적 카메라의 존재 때문이다. ‘창’으로서의 화면의 성격이 강한 영화라는 매체의 등장과 함께 회화는 ‘화면(畵面)’의 ‘면(面)’이라는 기본단위에 천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오연진과 백종관의 작업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위치에서 창으로서의 화면을 건드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연진의 개인전 《Lace》에서 특기할만한 것 중 하나는, 전시 중인 작품들의 제목 모두 “Solar breath”라는 어구 뒤에 “00:00” 형식의 러닝타임을 덧붙인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었다. 〈Solar breath〉는 마이클 스노우의 약 60여 분짜리 영상 설치 작업이며, 유튜브 에서 5분짜리 축약 버전을 볼 수 있다. 《Lace》의 작품 제목들 뒷부분의 러닝타임은 모두 “05:00”에 미치지 못하는데, 이 사실은 오연진이 보고 레퍼런스 삼았을 〈Solar breath〉가 5분짜리 유튜브 축약본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추론을 가능케 한다.

잠시 〈Solar breath〉에 대해 짧게 묘사하자면, 고정된 카메라로 하얀 커튼이 달린 두 쪽의 창문을 롱테이크로 촬영한 영상이라 할 수 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불어 들면서 커튼이 창 안쪽(창이 달린 공간 안쪽)으로 날리다가, 바람이 불어나가면 커튼이 창문틀의 방충망에 딱 들러붙는다. 이러한 커튼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는 바람에 대해 마이클 스노우는 “태양의 숨결”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영상 속에서 관객은 화면의 깊이가 갖춘 스펙트럼을 넓게 오가는 바람을 바라봄으로써 화면 내부의 공간감을 지각한다.

《Lace》의 작품들에는 조각상이나 교회와 같은 형상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작품들은 크게 세 개의 군으로 나뉠 수 있다: (1) 캔버스 틀에 이미지가 프린트된 천을 씌우고 그 위에 다시 아크릴 페인트를 칠한 작업, (2) 인화지 위에 크로모제닉 프린트(chromogenic print)된 사진을 나무판이나 액자에 표구한 작업, (3) 커다란 인화지에 크로모제닉 프린트된 사진을 인화지 채로 압정을 사용하여 벽에 고정한 작업. 그리고 이렇게 나뉜 군별로 화면상의 이미지 구성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면 (1)번 군의 작업과 (2)번 군의 작업 이미지에 포함된 주요 형상은 서로 대칭 한다. 〈Solar breath 01:31〉과 그 바로 옆에 걸려 있는 〈Solar breath 03:34〉 속 조각상의 형상이 서로 선대칭하고, 〈Solar breath 03:56〉과 〈Solar breath 04:19〉 속 교회의 형상이 서로 선대칭하는 것이다. 형상의 대칭 뿐 아니라 색 또한 서로 반전되어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이미지 구성상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사진 작업인 후자에는 화면 가장 위에 십자 모양의 창 혹은 캔버스 틀 형상이 있고 그 너머로 앞서 말한 조각상이나 교회와 같은 형상이 보이는 반면, 회화작업인 전자에서는 캔버스 틀의 형상이 그림자와 같은 희미한 어둠의 모습을 한 채 얇은 캔버스 천을 통과하여 비친다. 한편 (3)번 군의 작업에는 앞의 두 군의 작업에 등장했던 조각상이나 교회의 이미지가 레이스 천 위에 오른 채 구겨진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오연진은 전통적인 인화의 방식을 통해서나 프린트된 캔버스 천 위에 다시 아크릴 페인팅을 함으로써 복수의 면들을 한 화면 위에 ‘압축’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압축된 면들 사이에 공간감과 비슷한 것이 생성된다는 점이다. 이 유사-공간감은 환영적 공간의 구축이라는 일반적 맥락과는 동떨어져 있는데, 그것이 카메라가 ‘포착’하는 실제와도, 회화가 구축하는 재현의 공간과도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외려 이 유사-공간감은 오연진의 작업이 갖는 두 가지 차원의 ‘대칭’의 결과이다. 하나는 시간을 담아내는 방법에 있어서 영상 매체(〈Solar breath〉)와의 대칭, 다른 하나는 물리적 지지체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의 (1)번 군의 작업과 (2)번 군의 작업 간의 대칭이다.

첫 번째 대칭은 간단하다. 영상이 카메라가 대상을 포착하는 ‘시간’ 자체를 너무도 당연하게 담아낸다면(특히나 〈Solar breath〉와 같은 작업은 더욱 그럴 것이다), 오연진의 사진 작업들((2)번 군과 (3)번 군의 작업들)은 인화 과정에 있어서의 노출 시간을 통해 시간을 담아내고자 한다. (3)번 군의 작업에서 보이는 구겨진 얇은 천(과 함께 ‘구겨진’ 교회와 조각상 이미지들)은 더욱 확연히 그러한 시간성을 담지하고 있으며 이미지를 출력한 천 위에 아크릴 페인트를 올린 (1)번 군의 작업에서도 작업 과정 덕택에서 시간성이 담보된다. 더불어 전시장에 보이지 않는 ‘원본’(조각상이나 교회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을)이 각기 다른 세 가지 방법—이 방법을 통해 각기 다른 세 개의 작업 군이 ‘출력’된다—으로 반복되는 것 또한 오연진이 시간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서 캡션과 서문이 적힌 종이를 손에 쥔 뒤 벽을 따라 시계방향을 둥그렇게 걸어가며 반복과 대조의 방법을 경유한 ‘출력’이 갖는 시간성을 염두에 두게 된다.

두 번째 대칭에선 이미지가 올라간 지지체와 프레임 간의 관계가 중요해진다. (1)번 군의 작업에서 얇디얇은 지지체 위에 이미지가 올랐기에 뒤에 위치한 캔버스 틀이 비치게 되고, 따라서 프레임이 이미지 뒤에 있으면서도 신기루처럼 어렴풋이 보이게 된다. 그러나 (2)번 군의 작업에선 프레임이 화면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데, 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십자 모양의 형상은 캔버스의 틀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창문의 틀 또한 연상시킨다. (어렸을 적 그렸던 ‘집’ 그림의 창문은 언제나 십자 모양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따라서 교회나 조각상, 책등의 이미지는 인화의 과정을 생각했을 때는 캔버스 틀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인 동시에, 또한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이다. 이 요상한 ‘너머’의 감각이 오연진이 새로이 주조한 ‘창’의 감각이다.

반대로 백종관은 본인의 개인전 《파리대왕독본》의 메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영상 작업 〈추방자들〉에서 공간감으로부터 시작해 그 공간들을 분할하는 면들의 파편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오연진을 마주보고 있다 할 수 있다.

해당 전시의 영어 제목 “Fly on the Eye”가 암시하듯이, 〈추방자들〉은 러닝타임 내내 창문 유리창 안쪽(즉 창문이 설치된 공간 내부)에 앉아 있는 파리의 시점과 동기화된 카메라 뷰를 보여준다. 스노우의 〈Solar breath〉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고정된 채 창 밖 공원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는, 창이라는 면과 그 너머의 풍경과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어 일견 화면의 공간감을 의도하는 플랑 세캉스인 것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관객이 바라보는 시점이 창 ‘안쪽’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란 걸 주지시키기 위해 창 바깥의 사운드는 차단되고 오직 창 안쪽 공간의 소음들—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물건을 책상 위에 놓는 소리 등—만이 끊임없이 들린다. 창 너머 멀리, 희미하게 얼굴도 확연히 분간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보이는 것은 그들의 몸짓이다(그들의 몸짓은 분명 과장 되어 있다). 총 30분짜리의 이 영상 작업은 그렇게 고정된 카메라에 포착되는 작지만 명백한 움직임들을 담아낸다. 혹은 카메라 가 멈추어 서 있기에 관객은 그러한 움직임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 부가되는 ‘움직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시간의 경과다. 이 작업에서 시간은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다. 바로 공간감을 이루는 면들을 분해하는 것.

관객은 어느새 창 밖이 어두워지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창 안쪽(즉 보이지 않는 카메라 뒤편)의 빛들이 하나둘 켜지면서 창에 비치는 것을 본다. 창 밖은 어둡고 (보이지 않는) 창 안은 밝으며, 그 빛들이 창 표면에 비친다. ‘창으로서의 영화’에 특유한 공간감의 자리에, 면과 면들 간의 관계가 대신 들어앉은 것이다. 말하자면 공원의 풍경이 속한 면이 있고, 카메라가 혹은 파리가 앉아 있는 면이 있고, 다시 관객 혹은 파리 혹은 카메라의 뒤통수에 위치하여 오직 창에 반사되고 들리는 것으로써만 지각되는 (보이지 않는) 면이 있는 것이다.

창 안쪽과 창, 그리고 그 너머의 관계를 면과 면과 면의 관계로 드러내는 백종관의 전략 속에서 재현 혹은 관찰/기록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또한 엿보인다. 〈추방자들〉의 가장 극적이며 동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아직 해가 밝게 떠 있을 무렵 공원에서 놀던 한 무리의 사람 중 한 명이 화면 가까이 걸어 나와 카메라를 향해 손짓을 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갑자기 그들을 엿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다. 그들이 그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면(面)에 기거하고 있는 일종의 주체라는 사실이, 멍하니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던/혹은 창에 앉은 파리의 시점에 완전히 스스로를 동기화 했던 관객의 지각에 순간적으로 틈입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손짓을 하던 사람은 가까워진 카메라와 자신의 거리를 포기한 채 금세 친구들 무리로 돌아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이다. 결국 관객의 시야를 다시금 ‘막는’ 것은 이후에 도래할 바깥의 어둠이다. 창 밖이 밝을 때 창은 가시화되지 않고(우리 창에 묻은 때는 차치하도록 하자) 마찬가지로 창 안도 가시화되지 않는다. 대신 들린다. 그리고 창 밖만이 보인다. 그러나 이 어두워지면 창 너머에 있던 것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대신 어둠을 따라 하나둘 켜지는 창 안의 빛들이 창에 비치면서 창 안과 창이 가시화된다. 이때 창 표면에 비치는 빛들 또한 창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희천의 말마따나 ‘시뮬레이션의 세계’에서 뒤돌아볼 수 있는 자는 없기에 우리는 때론 어두워지는 시간에 켜둔 빛들이 비치는 우리 ‘앞’의 표면을 보면서 나 스스로가 속한 세계를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종관이 창으로서의 화면에 있어서는 역설적이게도 창의 표면을 부각시킨 것은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한계에 대해 지적하기 위함이면서 동시에 의 대상만큼이나 ‘너머’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닌 주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재)송은문화재단은 2020-2021 송은 아트큐브 전시지원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가 오연진의 개인전 《The Very Eye of Night》를 개최한다. 송은 아트큐브는 신진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고무하고 전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비영리 전시공간으로 2002년 1월 개관 이래 매년 공모를 통해 작가를 선정해 개인전 개최 및 향후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오연진은 작업 과정 내에서 수많은 변수들이 작용하는 인화 방식을 바탕으로 사진의 매체성을 탐구하는 다양한 실험을 전개해 왔다. 사진과 회화, 판화 등 다양한 매체들이 갖는 관계성에 주목하여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진행해 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영상의 이미지를 고유의 방식으로 재현하는 신작 〈Anorthoscope〉(2020)를 선보인다. 〈Anorthoscope〉는 마야 데렌(Maya Deren, 1917~1961)이 1958년에 발표한 흑백 단편 댄스필름 〈밤의 눈(The Very Eye of Night)〉을 기반으로 한 작업이다. 영화는 별빛이 반짝이는 어두운 밤하늘 같은 배경에 네거티브 필름으로 촬영된 무용수들의 이미지가 하나둘씩 떠오르며 시작된다. 얼핏 보면 납작한 종이 인형 같은 인물의 형상들은 곧이어 전환되는 화면에서 움직임을 얻으며, 무한한 공간에서 중력에 무관한 춤사위를 펼치듯 검은 배경을 부유한다. 별자리에 관한 고대의 신화를 무용수의 몸짓으로 재현했다는 데렌의 영상은 그 자체로도 황홀할 만큼 아름답고, 물리적인 시공간을 초월하는듯한 신비로운 감상을 준다. 더욱 주목할만한 점은 작품에서 카메라의 역할이 단순히 무용수들의 동작을 담는데 그치지 않고, 어떠한 촬영과 편집 기술을 통해 이들의 움직임을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한쪽 발을 내딛는 무용수의 동작은 다시 전환되는 장면으로 이어지며, 이처럼 분절된 시간 속 각각의 장면들은 신체의 연속적인 움직임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즉, 이들의 ‘움직임(무빙)’은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다시 한번 움직임을 얻는다.

‘무빙’은 은연중에(혹은 직접적으로) 오연진이 최근 작업들을 통해 꾸준히 드러내온 키워드로, 그 관심의 출발점에는 ‘시간성’이 자리한다. 작업의 초창기부터 이어진 〈시리얼 북 시리즈(Serial Book Series)〉를 살펴보면, 작가는 2015년작 〈Still Mute〉에서 동명의 영상작업을 다양한 초당 프레임의 단위로 나누어 캡처하고, 이 이미지들을 각 초당 프레임에 비례한 이미지 스케일로 삽입하여 나타냈다. 2017년작 〈Quad by Ratio〉는 사뮤엘 베케트(Samuel Bechket, 1906-1989)의 단편극이 상연되는 정방형 무대가 다른 비율로 변화하면 어떻게 될지 가정하고, 이때 어떤 구조로 움직임이 확장될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공간적인 조건의 변화로 배우들의 동선이 왜곡됨에 따라 수반되는 시간상의 변화까지 도식화하여 나타낸 것으로, 작가에 따르면 이처럼 특정한 조건 하에 변주되는 요소들을 탐구하는 과정이 결국 모든 변화에 전제되는 ‘시간’과 그에 따른 ‘무빙’에 대한 관심의 단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연진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데렌의 이미지를 재현한다. 먼저 전시장의 중앙에 설치된 회화 작업들은 반투명한 재질의 쉬폰 천에 출력한 이미지를 캔버스 프레임에 씌우고, 여기에 아크릴 물감을 더해 완성되었다. 물감을 많이 발라 코팅한 상태의 캔버스 표면은 흡수되는 성질을 지닌 천이라기보다는 필름과 같이 매끈한 질감으로 표현된다. 전시장의 벽면에는 일종의 ‘판’ 역할을 한 캔버스를 인화지 위에 밀착인화해 얻어낸 결과물들이 액자나 틀 없이 그대로 전시된다. 인화 시 CMY 필터값이나 노광의 시간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여러 가지 변수는 작가가 예측하기 어려운 다양한 결과로 도출되었다. 예를 들어, 이론상으로는 캔버스 색상의 보색이 현상되어야 하지만 주변의 빛에 따라 예상치 못한 색이 나오거나, 노광을 주는 초 단위의 시간에 따라 상이 달라지는 수많은 경우의 수는 작가가 직접 컨트롤하려 하지도, 할 수도 없는 조건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상과 색감이 반전되어 나타난 〈밤의 눈〉의 장면들은 캔버스 상의 원본 이미지들과 서로 대칭을 이루며, 작가가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작업한 가상의 물 이미지와 함께 전시된다.

다른 작업 〈Lamella〉(2020)는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비눗방울의 형상을 담은 6점의 사진 연작이다. 오연진이 처음 일반적인 촬영 기법으로 카메라에 담은 피사체가 ‘비눗방울’이라는 사실은 유체 필름을 이용했던 지난 작업들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작가는 사진에 있어 ‘필름’이라는 조건을 변화시키고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자 OHP 필름으로 제작한 작은 케이스에 슬라임을 넣거나, 유리 판 위에 물을 흘려놓고 이를 촬영하는 등의 다양한 실험을 전개해 왔다. 비눗방울의 막은 틀에 따라 그 형태와 차원이 달라지며,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터져버린다는 점에서 순간적인 성질을 지닌 유동적인 물질이다. 막에 맺히는 무지갯빛 스펙트럼 또한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는 형태로 존재하며 빛이나 각도에 따라 다른 양태를 보인다. 이처럼 조건에 따라 형태가 결정되는 비눗방울의 성질은 작가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많은 학자들의 관심사였는데, 그중 비눗방울 막 사이에 존재하는 법칙을 발견한 19세기의 물리학자 조셉 플라토(Joseph Plateau, 1801-1883)가 무빙 이미지 장치인 아노토스코프와 페나키스티스코프를 발명했다는 우연은 비눗방울이라는 피사체를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오연진은 ‘무빙 이미지’를 조건이 변화하는 이미지로 정의한다. 이미지가 움직일 수 있다는 전제가 없이 제작된 장면과 그렇지 않은 장면은 다르다. 여기서 ‘무빙'이란 반드시 이미지가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이번 전시에서 마야 데렌의 이미지는 영상에서 캔버스로 복제되었다가, 다시 암실에서의 작업을 통해 사진으로 재탄생한다. 천장과 벽에 걸린 캔버스와 사진의 이미지는 매체를 옮겨가며 변화하는 비종결성을 통해 계속해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이미지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오연진의 작업들은 비록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움직임을 간직하고 있는 무빙 이미지다.

이러한 무빙의 세계가 독보적으로 근사한 지점에 닿아 있는 이유는 이 세계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무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일 수 있는 곳에서 정지 이미지는 비로소 무빙의 가능성에 도달한다.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proudly presents Yeonjin Oh’s solo exhibition The Very Eye of Night, as one of the selected artists shows from the 2020-2021 SongEun ArtCube open call. SongEun ArtCube is a nonprofit exhibition space established to encourage the artistic creativity and motivation of up and coming artists. Since its inauguration in January 2002, SongEun has supported a vast number of artists through the annual open call program by inviting selected artists to have a solo exhibition at SongEun ArtCube as well as providing a publication of their works.

Yeonjin Oh has been conducting various experiments to explore the mediality of photographs based on their printing method, in which a number of variables act within the working process. The artist works beyond the boundaries of the selected genre,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various mediums such as photography, paintings, and prints. In this exhibition, Oh presents 〈Anorthoscope〉(2020), which is a reenactment of the images. It is based on a monochrome short dance film, 〈The Very Eye of Night〉, released in 1958 by Maya Deren(1917~1961). The film begins with the sequence of negative images of dancers floating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dark, starry night. The flat figures that are visualized like paper dolls are granted movements in the following scene, and float in the dark and infinite space like dancing free from gravity. Her film in which dancer’s movements embody the ancient myths about astrology is fascinating and mysterious, as it transcends the physical realm of time and space. It is notable that the camera does not simply capture the motions but maximizes them by using specific editing and shooting techniques. As a step of a dancer flows to the following scene, each scene of segmented times is connected to each other by sequential movements of the body. In other words, their ‘moving’ gains monumentum once more through this medium of video.

‘Moving’ is the keyword that Oh has constantly presented over her recent works both explicitly snf implicitly, in which the main inspiration for the theme is the notion of ‘temporality.’ From Serial Book Series, the ongoing series from her early career, she captured the frames of the video of the same title, and inserted them to image scale in proportion to frames per second in 〈Still Mute〉(2015). She also considers the ratio of the stage from a short play written by Samuel Beckett (1906-1989) other than a square formation and considers how the movements would extend according to the stage in 〈Quad by Ratio〉(2017). It is interesting that she schematizes the temporal changes due to the swift changes in the actor’s movements according to its surrounding spatial change. The artist’s study on variations under certain conditions has inevitably incited a deeper understanding and curiosity to ‘time’, which is prone to change depending on the given circumstance.

Oh reproduces Deren’s images in two main ways. First, the painting on the right side of the exhibition room is completed with the touch of acrylic paints on the canvas covered by translucent chiffon with an image printed on it. Coated with layers of paints, the surface of the canvas feels soft like a film, but not like an absorbent material like cotton. The products of contact printing on the canvas, which serves as a kind of ‘plate’ are displayed on the opposite wall, without any frame. The outputs are distinct due to unpredictable variables when controlling CMY filter values or exposure time. For instance, unexpected colors other than complementary color of the canvas (theoretically) are printed out depending on surrounding lights. The tiny difference in exposure time, even if it’s a second, produces a number of different images, making it difficult to control. The images from The Very Eye of Night are reversed in color and form symmetry with the original ones on the canvas, displayed with the virtual images of water the artist made using graphic programs.

〈Lamella〉(2020) is a series of six photographs of bubbles with black backgrounds. The fact that ‘bubble’ is the subject of the artist’s first photograph shares context with her previous works using fluid films. To change the condition of ‘film’ and in turn create unique and diversified images, she conducted many experiences such as putting slime into a small case made out of OTP film or taking pictures of spoiled water on a glass plate. The film of a bubble is a fluid material in that it varies in form and dimension depending on the frame and pops in an instant. The rainbow spectrum on the bubble film is also unfixed, changing its forms depending on the light or angle. This flexible characteristic of bubble has drawn attention of many scholars as well as artists. Among them Joseph Plateau(1801-1883), a physicist in 19th century, discovered the law in the bubble film and invented moving image devices, Anorthoscope and Phenakistoscope. This coincidence makes bubble more attractive subject.

Oh defines ‘moving image’ as image of changing conditions. Whether the scenes are made with premise that image can move or not determines the output. ‘Moving,’ however, does not always indicate that image is actually transforming. Instead, Deren’s images in this exhibition are reproduced from video to canvas, and then re-printed to photograph in the darkroom. Canvases and photo images on the wall and the ceiling demonstrate open possibility of image that can expand infinitely and successively change mediums. As implying that image is unfixed and changeable, her works are moving images that have movements inside though they seem still.

What makes the moving world astonishing by itself is that things that do not move can move in this world. Only when the unmoving are moving, still images reach the possibility of moving.

네거티브의 이미지가 주인공인 전시를 상상할 수 있을까? 엄밀히 네거티브는 보이기 위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런 이미지를 복제하기 위한 인쇄용 판면이다. 그것은 원본 이미지를 반전시킨 (‘네거티브’) 상으로, 이미지를 이루는 특정한 색의 선과 면 또는 미세한 점의 그라데이션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을 인쇄 과정에서 차단하는 마스크 역할을 한다. 사진 이전에도 그림을 판화로 찍어내거나 책의 지면을 인쇄할 때 네거티브 판을 만들어 썼다. 전통적으로 그것은 인쇄 기술자의 영역으로, 완성된 이미지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단계에 속했다. 일종의 광화학적 인쇄술로서 사진 기술이 발명되면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필름을 현상하는 네거티브 기반의 이미지 제작 프로세스가 처음으로 대중화됐지만, 디지털 사진이 일반화되면서 네거티브는 사진적 실천과 분리되어 다시 인쇄술의 전문 개념으로 되돌아왔다.

사본을 제작하기 위한 사본으로서 네거티브는 일반적으로 그것이 봉사하는 원본 이미지를 보여주기에 적합하지 않다. 네거티브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지가 물질적으로 실현되는 제작의 공정이다. 다양한 소재의 판화 원판과 인쇄용 판, 필름과 필름 이전의 각종 사진 네거티브, 사진 이후 네거티브 기법이 활용되는 다양한 사례들, 그와 연관된 이미지들을 전시의 형태로 모아볼 수 있다면 무척 흥미진진할 것이다. 그것은 사진의 역사를 포함하여 넓은 의미에서 이미지 복제 기술의 역사를 망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복제’라는 말은 주의해서 써야 한다. 그것은 이미지를 찍어내는 물질적 프로세스를 이미 생성된 이미지를 동일하게 반복해야 한다는 이념적 목적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은 ‘복제 기술’의 역사를 재미있지만 오류가 많은 원시적인 기술들에서 출발하여,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원본과 차이 없는 사본을 양산하는 복잡한 첨단 기술로 귀결되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정돈해 버린다.

반면 사진은 이미지를 찍어내는 것 또는 물리적 각인에 의한 복제를 생성 이후의 이차적 가공이 아니라 이미지 생성에 수반되는 일차적 과정으로, 더 나아가 생성의 핵심 원리로 도입한다. 한 순간의 번쩍임으로 환원되지 않는, 찍어내는 과정의 연쇄에서 무엇인가 생겨난다. 하나하나의 네거티브는 이미지가 각인된 일종의 도장으로서 그 이미지가 어떻게 거기 찍혔으며 그것으로 어떤 이미지를 더 찍어낼 수 있는가 하는 역사성과 잠재성을 내포한다. 그것들은 동일자가 당연히 변하지 않는 세계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기적인 세계, 그럼에도 인간이 끊임없이 그런 기적을 추구하며 세계를 변화시켜온 역사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이미지를 굴리고 찍으면서 시간의 불연속면을 쌓아간다는 점에서, 네거티브의 운동은 영화와 전혀 다른 구조로 쌓아 올려지는 무빙 이미지의 계열을 전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을 전시의 형태로 모색하는 일은 복제 기술의 역사를 개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가 된다. 


오염된 실크 스크린 

네거티브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그 움직임이 어떻게 시각화되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는 오연진의 〈레이스〉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이 전시에는 네거티브를 지배하는 원본 이미지 같은 것은 없다. 겹쳐지고 찍히면서 변형되는 이미지의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전시장 왼편을 보면 네거티브 판과 그것을 인화한 판이 나란히 배치되어 기본적인 작업 방법을 도해하고 있는데, 마치 실크 스크린 공정이 회화적 붓질과 사진적 프로세스로 오염되어 뒤죽박죽이 된 것 같다. 반투명한 천에 이미지를 인쇄하여 회화용 프레임에 씌우고 그 위에 다시 아크릴 물감을 발라서 네거티브 판을 만들고, 그것을 뒤집어서 감광액을 바른 종이에 대고 안료 대신 빛을 통과시켜 일종의 광학적 판화를 찍어낸다. 그 결과는 판화와 회화와 사진의 스테레오타입 중 어느 것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제작 방식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눈에 보이는 이미지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전시된 작업들은 ‘회화’처럼 자기 완결적 공간 또는 대상을 묵상하는 고요한 시간을 제공하지도 않고, ‘사진’처럼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무언가와 직면하는 찰나의 순간을 재생하지도 않는다. 이미지의 평면들은 두께 있는 몸체를 입고 무지개 색으로 빛을 산란시키는 기름막처럼 시선을 어지럽힌다. 이들은 자기가 단일한 이미지가 아님을 계속 상기시키면서, 다수의 이미지들이 적층되고 밀착되며 서로를 찍어내고 또 찍히기를 반복하는 불투명한 운동의 시공간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이 운동이 원본과 사본의 구별을 무시하고 매체들 간의 경계를 짓밟으면서 모든 것이 무차별적으로 녹아내리는 수렁으로 돌진하는 것은 아니다. 오연진은 이미지들을 가상적이고 두께 없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점유하는 얇은 몸체로 가동해 보면서 그것들의 고유한 리듬과 구조, 주제와 모티프를 찾으려 노력하는데, 특히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막과 판 사이의 진동이다.

평면의 두 가지 양태로서 막과 판은 오로지 물질적 조성과 물리적 구성의 차이로 구별된다. 판이 딱딱하게 고정된 납작한 입체로 존재한다면, 막은 그보다 더 얇고 유연해서 판과 다른 방식으로 시공간을 점유한다. 막은 하늘하늘하게 움직이며 빛을 수용하는 동시에 차단할 수 있다. 막은 쉽게 말리고 구겨지고 접히며, 서로 겹쳐져서 또 다른 막을 산출할 수도 있고 단단한 지지체가 더해지면 판으로 변형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판은 다시 막으로 전사될 수 있다. 막이 운동 속에 있다면, 판은 그 운동이 잠정적으로 끝나고 새롭게 재개될 수 있는 종점이자 출발점, 또는 일종의 회전문이나 룰렛처럼 멈춰 있다. 전시는 “레이스(Lace)”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판의 견고함보다 막의 운동성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제로 전시장에 들어와 있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지 않게 물리적, 화학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막보다는 얇은 판에 가깝다. 이 판들이 막의 실물과 잔상들을 겹치고 나열하면서 막의 반투명한 관념들 또는 흐릿한 기억들을 전시장으로 불러들인다. 


막과 창문 

작가는 자신이 참조한 막의 역사적 선례들을 전시의 실마리처럼 여기저기 흘려 놓았다. 먼저 전시된 연작의 제목을 빌려온 마이클 스노우(Michael Snow)의 〈태양의 숨(Solar Breath)〉(2002)에 등장하는 하얀색 커튼이 있다. 그것은 오두막 창문으로 바람이 드나들 때마다 마치 숨쉬는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하며 공간의 빛과 소리를 리드미컬하게 조율한다. 여기서 커튼은 동시에 여러 가지로 존재하며 끊임없이 모습을 바꾼다. 평면과 입체,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르면서, 그것은 빛을 조절하는 시각적 장치인 동시에 공기와 상호작용하는 일종의 악기가 되지만 그 작동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연적인 것이다. 창문과 커튼으로 이루어진 이중 구조와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다양한 양상들은 전시작들을 구성하는 데 하나의 가이드로 작용한 듯하다. 그것은 이미지가 물리적 몸체를 경유하여, 그렇지만 접촉에 의한 전사로 국한되지 않는 좀 더 개방적인 방식으로 움직여 나갈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기계적 각인이 아닌 변덕스러운 숨결의 형태로 배어든다. 이미지들이 움직이면서 리듬은 있으나 법칙은 없는 유체적 공간을 형성한다. 이렇게 일렁이는 공간을 통해 이미지들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본다면, 이를테면 광화학적 변성이 이미지의 변질이 아니라 생성을 약속하는 것으로 처음 인식되었던 시간을 여러 겹의 막으로 떠내어 창문처럼 벽에 고정해 놓으면 무엇이 보일까. 전시는 네거티브 기반의 사진술을 처음 고안한 윌리엄 폭스 탤벗(William Fox Talbot)의 『자연의 연필(The Pencil of Nature)』(1844)에서 한 구절을 머리말처럼 짧게 인용하는데, 이 대목을 실제로 책에서 찾아보면 마치 전시작들을 구성하는 재료의 목록처럼 읽힌다. “건물, 조각상, 초상화 등은 음영이 반전되어 네거티브 이미지로 알아보기 어렵고 포지티브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레이스나 나뭇잎 같은 것을 본뜰 때는 네거티브 이미지로도 충분하니, 검정색 레이스는 흰색 레이스만큼 자연스럽게 보이고 대상의 패턴을 정확히 전달한다.”

일단 초기 사진의 역사를 의식하고 전시를 다시 보면, 사진이란 무엇인가가 아직 미확정 상태였을 때의 사진 이미지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작가의 머릿속에 누적되었다가 작업의 형태로 재조합 되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단단한 금속성의 다게레오타입과 부드러운 섬유질의 칼로타입, 그것을 통해 기록된 19세기 중반 유럽의 꿈세계가 아무 기억도 향수도 없이 냉정하게 재생된다. 그때와 지금을 가로지르는 것은 레이스 또는 천의 물리적 이미지, 막 위에 놓인 막의 잔상이다. 탤벗은 고고학, 식물학, 예술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교양인이었고, 그런 시대적 특성은 그가 택한 사진의 소재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하지만 그는 장식 패턴의 레이스나 심지어 무늬 없는 천조각도 많이 찍었다. 아마도 사진 기술을 시험하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 패턴이었겠지만, 귀퉁이가 접히고 올이 풀린 천의 잔상이 사진으로 남은 것을 보고 있으면 그가 이 불규칙한 형태들의 정밀한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을 그저 좋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천의 오톨도톨한 면을 빛으로 훑는 그 원격의 감촉을 길잡이 삼아 이미지들이 거쳐온 길과 거쳐갈 수 있는 길들이 뒤섞인 미지의 시공간을 항해하고 지도 그린다.

이미지의 시공간을 향한 일종의 창문으로서 이 작업들이 무엇을 보여주는가는 단언하기 어렵다. 식별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식별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너스의 얼굴이 있다. 수천 년 전에 제작되고 수백 년 전에 발견된 밀로의 비너스가 다른 비너스들과 뒤섞이고 다른 그리스 로마 조각상들과 연합되어, 수많은 석고상과 사진, 연필 데생과 3D 모델링 이미지로 복제된 끝에 여기 도착했다. 고전적 아름다움의 표본이자 미술과 미대 입시의 상징이며 베이퍼웨이브의 필수 요소로서 그 이미지들이 언제에 속하고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확정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여러 시간과 공간에 흩어져 있다. 그 중 몇몇은 탤벗의 소유였다. 그는 고전 조각상의 미니어처 석고 복제상을 수집했고 종종 그 물건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말하자면 그것이 그의 핀터레스트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복제는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퍼뜨리는 수단이었지 그것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조그만 비너스 복제상을 다양한 각도와 화학적 배합으로 반복해서 촬영하는 동안 이미 비너스의 의미는 조금씩 산란되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그 시간을 응시하고 다르게 재가동할 수 있는 여지를 찾고 있다. 

… in copying such things as lace or leaves of plants, a negative image is perfectly allowable, black lace being as familiar to the eye as white lace… (William Henry Fox Talbot, The Pencil of Nature (London: Longman, Brown, Green and Longmans, 1844), 56.)  

디지털의, 그래픽의 공간. 1과 0.9999999999999 사이에도 엄청난 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무한을 담아내는 작은 세계에서 숫자로 제시되는 좌표는 소수점 하나, 자릿수 하나들을 늘리거나 줄이도록 미세하게 조정되면서 아주 치열하게 그 공간(화면)을 마주한 이에게 구현된다. 영점이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오연진은 시간이나, 스케일, 초점 거리 같은 조건들을 부여하면서 그 조건들의 반복과 조건들 간의 상호 간섭이 생산해내는 패턴들의 다양한 변주를 즐겨왔다. 패턴들의 변주 과정에서 상의 역전은 꽤 주요하게 등장하는데 0과 1을 전제하는 공간에서 1과 0의 자리는 쉽사리 뒤바꼈다.

영어에서 필름은 주로 ‘negative’라고 표현되었는데 인류가 가장 왕성하게 소비한 필름이 바로 반전된 상이 맺힌 필름이기 때문이다. 반전된 필름의 상에 다시 빛을 투과하면 우리의 눈에 익숙한, 본래의 상으로 다시 반전된다. 단순한 역전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어쩌면 반대로 거울을 마주할 때, 거울은 마주한 나를 부대낌 없이 보여준다. 사진은 세계의 형상이 필름이라는 지지체에 달라붙은 면, 그 면을 축으로 대입되는 다양한 조건들이 마지막 이미지의 결과를 다르게 한다. 이와 반대로 거울은 내가 속한 세계, 그 자체를 제시해주는 듯하지만, 거울면은 네거티브 필름과는 다른 형태로 나를 반사할 뿐이다. 여전히 거울의 면이 존재하고, 그 거울의 면을 중심으로 역전된 나의 이미지가 보여진다.

‘-‘가 ‘+’가 되거나 물이 얼거나 녹아버리는 것처럼, 세계의 역전은 자연스럽고, 물리적인 세계의 장은 이런 역전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범주들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 예측 가능하다고 하지만 번번히 나의 기대를 배반하고 마는 이 범주들 사이엔 그래픽의 세계에서는 통제할 수 있었던, 통제할 수 없는(때로는 인지할 수 없는) 무수한 조건과 상황들이 빽빽하게 끼어있다. 여기는 온전히 자신일 수 없는 세계이다. 화면(공간)의 바깥 세계, 타자들의 세계에서 오연진은 동일한 원리를 사용해보곤 했다. OHP 필름에 빛을 투과시키거나 자른 패턴들의 면에 에어브러시를 사용해보는 등 인과관계가 있는 효과로써 깊이를 구현해보는 것, 오연진은 그것을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통제라는 말이 무색할 조건들, 커다란 작품 사이즈의 인화지를 직접 칠해서 만든다든지, 온도 조절이 어려운 공간 안에서 컬러 작업을 하는 등, 오가면서 오연진은 사진을 만든다. 그러면서 이미지의 면이라는 것 자체를, 하나의 영점으로 설정하고 그것에 다양한 조건들을 대입해보기 시작했다. 대형 확대기를 사용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취하면서도 오연진은 반전이라는 조건 넘기를 수행해본다. 오연진의 작업 속 이미지의 면은 축을 중심으로 한 면의 상황들을 다른 면으로 그대로 투과시키기도 하고(창의 모양을 한 캔버스나 물감칠의 새어 나옴), 그 자체를 다시 영점으로 설정하여 다시 역전 시켜보기도 하면서 탈봇이 과거 세계를 온전히 담고자 했던 사진이라는 이미지의 면, 그 이미지 면이 수용할 수 있는 조건에 도전하고 그것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실험한다.

Michael Snow의 “Solar Breath”(2002)는 해안가의 소담스런 창 하나를 고정된 시선으로 담는다. 수수한 흰 커튼 뒤로 창의 실루엣이 보이고, 거의 닫힌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면, 커튼은 공기를 한 움큼 안았다가 창에 바짝 붙어 버리기를 반복한다. 일정한 패턴처럼 반복되는 이 장면을 두고 작가는 “태양의 숨”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커튼의 움직임으로 살짝살짝 창 밖의 세계를 보임으로써 창은 (외부로의 연결이라는) 그 기능을 완전히 배반하지는 않으면서, 딱 붙은 커튼의 패턴을 통해 자신을 바로바로 드러낸다. 또 외부를 보이는 2차원의 면이 외부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준다.

오연진 작가의 불룩 솟은 이미지의 틈 사이로 하얀 벽의 공간감이 제시될 때, 배어 나온 혹은 칠해진 물감이 찍힌 이미지의 부분들이 이미지의 상을 교란할 때 이미지의 물리적인 면은 이미지 면의 축이 과정 속에서 서로를 넘고 지나온 변주들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미지라는 고유 영역에 타자의 세계가 마구마구 개입함으로, 그 과정의 중간에서 이미 이미지는 자신이 품었던 세계로부터 한없이 멀어진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홀연히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기도 한다. 역전의 역전의 역전된, 투과하고 다시 역전해서 반사시키는 세계의 상에 대하여.

한동안 비가 오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경계, 비가 내리고 있는 젖은 땅과 마른 땅의 경계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했다. 머릿속으로는 어떤 선의 형태로 경계가 나눠질 것이라고 가설을 세웠지만, 그 경계를 확인하려는 시도는 이동 중에 비가 오거나 그쳐 있는 걸 뒤늦게 인지하면서 번번히 좌절됐다. 하지만 애초에 가설 자체에 오류가 있었는데, 비구름 자체도 움직이거나 확산/축소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을 뿐더러, 그 경계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가느다란 선이 아니라 포토샵에서 경도를 0%로 설정한 브러시처럼 그라데이션 형태를 띨 것이라고는 한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비가 오는 경계는 지면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시점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스케일이기도 했다.

비가 오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경계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은 사진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때 종종 다시 떠오른다. 특히 어디까지가 사진이고 또 어디부터는 사진이 아닌 것으로 봐야 하는지라는 물음 앞에서 어쩌면 그 경계 자체가 현재의 시점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특히 사진은 비처럼 이동하거나 확산/축소되는 수준을 넘어서, 스스로의 개념 자체가 변화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변화의 폭이 크고 그 양상도 예측이 어렵다. 또한 어떤 정의를 기준으로 이를 빗나가는 속성, 즉 반례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덕분에 명백하게 ‘사진’이라고 할 수 있거나,  ‘사진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별로 어렵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둘 사이의 경계에 놓이는 것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들을 모두 ‘이미지’ 정도로 퉁쳐버리지 않는 한) 쉽사리 답을 내기가 어렵다. 

오연진은 사진과 사진이 아닌 것, 회화와 회화가 아닌 것 사이에서 어떤 경계를 찾거나, 스스로 경계를 규정하려 하기 보다는 양자의 속성이 겹쳐지거나 모두 흐릿해지는 어떤 지점에서 작동하는 시각체계를 탐구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진의 전통적인 프로세스인 암실 작업을 자신의 주된 도구로 삼는다. 이런 지점에서 그에게 ‘사진을 찍는 자신’이나 ‘나는 무엇을 찍을 것인가’와 같은 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좀 더 정확하게는 작업 과정에서 ‘사진’이라는 프로세스는 핵심적인 요소이지만, 카메라나 이를 통해 촬영한 개별 사진들은 거의 배제돼 있다. 물론 직접 찍은 사진이 기반이 된 작업은 존재하지만 여기서 해당 사진의 역할은 무엇을 재현한다기 보다는 마치 프린터의 ‘테스트 페이지’에 등장하는 도형과 패턴처럼 기능적인 차원에서 샘플 이미지로만 작동한다. 이런 측면에서 오연진의 작업은 작가는 자신이 뭘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실험하는가-일종의 시각적 농담이나 트릭이 아닌 차원에서-가 중심이 된다. 그리고 이는 ‘카메라 없는 사진(Camera-less Photography)’의 범주에서, 그 실험은 암실의 확대기와 인화지 뿐 아니라 캔버스와 물감을 통해서 변주된다. 이들은 어떤 관점에서는 ‘사진’이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의 ‘카메라 없는 사진’은 사진(Photo, Photograph) 보다는 ‘사진술(Photography)’로서의 의미에 방점이 찍히며 다분히 사진적인 논의를 이끌어낸다.

〈Check and Stripe Prints〉(2016) 시리즈는 격자나 줄무늬 같은 기하 패턴을 OHP 필름에 인쇄하고 이를 35mm 필름 사이즈로 잘라 확대기에 걸고 스케일, 초점거리, 노출시간, 인화지의 휘는 정도 등 암실 프로세스에서 가능한 여러가지 변수들을 조절해가며 만들어졌다. 최종 결과물로서 인화지에 프린트된 각각의 패턴 이미지들은 비슷하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다. 이들은 모두 같은 OHP 필름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점에서 확대기에 장착된 필름과 그 아래 놓인 인화지 사이의 공간이 어떻게 각각의 이미지에 개입하고 변수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가상적 깊이감에 대한 실험은 〈Tilt〉(2015-2016)나 〈Color Index〉(2015) 시리즈로도 이어진다. 〈Tilt〉 시리즈는 작가는 동일한 사진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인쇄와 암실에서의 흑백인화 프로세스(젤라틴 실버 프린트) 작업을 통해 실크스크린 판을 기울여 에어브러쉬를 분사한다거나 암실에서 인화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변화를 주어 프린트하고, 이를 방향과 기울기에 따라 각기 다른 각도로 바닥에 설치한다. 이를 통해 사진 이미지 자체의 깊이감과 틸트 인쇄를 통해 만들어진 두 가지의 깊이감이 중첩되지만, 이들은 명확히 구별될 수 없는 상태로 남으면서 평면과 평면, 그러니까 이미지와 지지체 사이에 마치 진공상태 내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돼온 공간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러한 작업-실험은 암실 프로세스나 실크스크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지체로 확장/변주된다.  〈Color Index〉 시리즈는 13인치 노트북 액정화면에 256개의 색상들을 하나씩 화면에 띄우고, 이를 노트북 액정을 3가지 각도로 기울여 촬영한 작업으로 여기서 노트북의 액정화면은 암실에서의 필름이자 확대기로 기능한다. 768개(256x3)의 이미지는 퍼스펙티브가 제거되고 동일한 사이즈로 규격화돼 액정화면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른 색상의 변화를 시각화한다. 기준이 되는 이미지는 256개의 색상 파일이지만, 액정화면과 이를 바라보는 눈(또는 카메라)의 시점 사이의 깊이와 각도에 따른 변화를 보여주면서 하나의 이미지가 그것과 지지체 사이의 공간에 의해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 시각화한다. 이는 또한 우리의 시각이 이를 스스로 어떻게 보정하거나 착각해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Check and Stripe〉 시리즈에 선행됐던 〈Surface〉(2016) 시리즈는 지지체를 캔버스-물감으로 상정한다. 격자 패턴을 기울여 우레탄 페인트로 두께감을 만든 후, 에어브러시로 아크릴 물감을 같은 형태로 분사해 겹쳐내면서 지지체(우레탄 페인트 부분) 자체의 질감, 요철과 그 위에 포개진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짚는다. 이는 이미지-지지체-관람자의 시점이 일직선이 되는 정면 또는 (이를 다시 촬영한)도판 이미지에서는 얼핏 미묘하게 격자가 어긋난 두 레이어가  겹쳐진 이미지로 보이지만, 이를 좀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지지체 자체의 물리적인 패턴과 아크릴 물감으로 분사된 패턴이 분리되면서 이미지와 지지체 사이에 환영적인 틈을 만들어낸다. 이같은 틈을 만드는 작업은 〈Trade-off〉(2017) 시리즈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구현되는데, 암실 프로세스에서 적용할 수 있는 변수들을 분화시켜 프린트한 48장의 이미지를 격자로 배치한 이 작업에서 48장의 사진은 격자로 배치되며 하나의 레이어로 놓이지만, 이는 각각의 변수(노광시간, 스케일, 초점거리)를 통해 시각적인 차원에서의 틈 뿐만 아니라 노광시간을 통해 시간적인 격차까지 (다른 사진과 비교를 거쳐)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 다룬 오연진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픽셀 단위로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다소 극단적인 차원에서) 포토샵으로도 유사한 형태를 구현할 수 있지만, 이는 광/화학적인 인과관계로 도출된 것이기보다는 결과값만을 시각화한 목업(Mock-up) 이미지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까지) 작가가 굳이 암실 프로세스를 주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이는 단순히 초기 사진가들이나 과거의 사진가들이 해왔던 작업을 스스로 실습하거나 암실 프로세스 자체에서 오는 흥미로움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포토샵과 디지털 이미지가 기본값으로 전제된 현재의 시점에서 또다시 분화된 사진의 지지체와 시각성을 살펴보고 이를 직접 실험하는 과정에 가깝다. 사진술로서의 암실 프로세스와 포토샵은 하나의 시각체계-프로그램이라는 맥락에서 얼핏 비슷해 보이고, 더욱이 포토샵은 암실 프로세스에서 가능한 기능을 모두 포괄하며 아날로그 사진술을 대체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포토샵에서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 순서나 과정보다는 최종적으로 이것이 jpg와 같은 확장자로 내보내질 때의 이미지가 중심이 된다. 모든 과정과 결과값이 실시간으로 화면에 반영되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기능 안에서) 모든 변수는 사용자에 의해 통제되고, 그 과정에 인과관계나 자연의 법칙이 개입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암실은 마치 수학 문제를 풀거나 요리를 하는 것처럼, 주어진 조건 사이에서 어떤 값을 대입하고, 어떤 변수를 만들어내거나 없애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고 이는 사용자의 의도에 부합할 수도,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포토샵은 기능적인 면에서 암실에서 가능한 범주 이상의 것을 수행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에 선행하진 못한다. 자신의 지지체인 액정화면 자체의 한계로서 이미지와 지지체 사이에 공간이 전혀 확보될 수 없고, 비록 이를 시각적인 트릭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사이의 거리는 0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기 때문이다. 포토샵이라는 프로그램 자체의 한계를 실험하는 게 아니고,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사진(술)을 둘러싼 시각적 현상들을 관측하고, 이를 실험하는 작업이라는 전제 하에서 작가에게 암실 프로세스는 단순히 쇠퇴한 과거의 기술에 머물지 않는다.

제프리 배첸(Geoffery Batchen)은 『사진의 고고학』의 결론부 ‘사진의 죽음’에서 “사진은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회귀하여 출몰하는 하나의 논리일지 모른다. 사진은 자기 자신의 ‘영매(Medium)’인 것*”이라 말한다. 사진의 정체성이 단일한 어떤 것이라거나 무언가로 환원되는 것이기 보다는, ‘확정되지 못한 것’으로서 유예되는 복합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연진의 주된 매체는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사진’이 아니라 하나의 시각체계로서의 ‘사진술’에 가깝다. 이들은 사진이면서도 사진이 아니고 사진이 아니면서도 사진인 (비가 오는 곳과 오지 않는 곳의 경계지대 같은) 그 모호한 영역에 위치한다. 작가는 사진이 ‘무엇’인지 규정하려 하기 보다는 그 자체를 실험도구로 활용하며 평면 이미지에서의 시각성 자체를 자신의 연구범위로 둔다. 그렇기에 오연진의 작업을 두고, 사진과 사진이 아닌 무엇을 분류하려는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고, 혹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별로 유의미한 행위는 아닐 것이다. 작가가 스스로 말했듯, “‘이것이 사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순간조차도 비-사진은 사진이 되기**” 때문이다.

* 제프리 배첸, 김인 역, ‘사진의 고고학’, 이매진, 2006, 260p.
** 오연진 작가노트 ‘사진, 매체, 조건, 클리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