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면서 사진이 아닌 것
2018
이기원

한동안 비가 오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경계, 비가 내리고 있는 젖은 땅과 마른 땅의 경계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했다. 머릿속으로는 어떤 선의 형태로 경계가 나눠질 것이라고 가설을 세웠지만, 그 경계를 확인하려는 시도는 이동 중에 비가 오거나 그쳐 있는 걸 뒤늦게 인지하면서 번번히 좌절됐다. 하지만 애초에 가설 자체에 오류가 있었는데, 비구름 자체도 움직이거나 확산/축소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을 뿐더러, 그 경계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가느다란 선이 아니라 포토샵에서 경도를 0%로 설정한 브러시처럼 그라데이션 형태를 띨 것이라고는 한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비가 오는 경계는 지면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시점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스케일이기도 했다.

비가 오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경계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은 사진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때 종종 다시 떠오른다. 특히 어디까지가 사진이고 또 어디부터는 사진이 아닌 것으로 봐야 하는지라는 물음 앞에서 어쩌면 그 경계 자체가 현재의 시점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특히 사진은 비처럼 이동하거나 확산/축소되는 수준을 넘어서, 스스로의 개념 자체가 변화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변화의 폭이 크고 그 양상도 예측이 어렵다. 또한 어떤 정의를 기준으로 이를 빗나가는 속성, 즉 반례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덕분에 명백하게 ‘사진’이라고 할 수 있거나,  ‘사진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별로 어렵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둘 사이의 경계에 놓이는 것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들을 모두 ‘이미지’ 정도로 퉁쳐버리지 않는 한) 쉽사리 답을 내기가 어렵다. 

오연진은 사진과 사진이 아닌 것, 회화와 회화가 아닌 것 사이에서 어떤 경계를 찾거나, 스스로 경계를 규정하려 하기 보다는 양자의 속성이 겹쳐지거나 모두 흐릿해지는 어떤 지점에서 작동하는 시각체계를 탐구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진의 전통적인 프로세스인 암실 작업을 자신의 주된 도구로 삼는다. 이런 지점에서 그에게 ‘사진을 찍는 자신’이나 ‘나는 무엇을 찍을 것인가’와 같은 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좀 더 정확하게는 작업 과정에서 ‘사진’이라는 프로세스는 핵심적인 요소이지만, 카메라나 이를 통해 촬영한 개별 사진들은 거의 배제돼 있다. 물론 직접 찍은 사진이 기반이 된 작업은 존재하지만 여기서 해당 사진의 역할은 무엇을 재현한다기 보다는 마치 프린터의 ‘테스트 페이지’에 등장하는 도형과 패턴처럼 기능적인 차원에서 샘플 이미지로만 작동한다. 이런 측면에서 오연진의 작업은 작가는 자신이 뭘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실험하는가-일종의 시각적 농담이나 트릭이 아닌 차원에서-가 중심이 된다. 그리고 이는 ‘카메라 없는 사진(Camera-less Photography)’의 범주에서, 그 실험은 암실의 확대기와 인화지 뿐 아니라 캔버스와 물감을 통해서 변주된다. 이들은 어떤 관점에서는 ‘사진’이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의 ‘카메라 없는 사진’은 사진(Photo, Photograph) 보다는 ‘사진술(Photography)’로서의 의미에 방점이 찍히며 다분히 사진적인 논의를 이끌어낸다.

〈Check and Stripe Prints〉(2016) 시리즈는 격자나 줄무늬 같은 기하 패턴을 OHP 필름에 인쇄하고 이를 35mm 필름 사이즈로 잘라 확대기에 걸고 스케일, 초점거리, 노출시간, 인화지의 휘는 정도 등 암실 프로세스에서 가능한 여러가지 변수들을 조절해가며 만들어졌다. 최종 결과물로서 인화지에 프린트된 각각의 패턴 이미지들은 비슷하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다. 이들은 모두 같은 OHP 필름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점에서 확대기에 장착된 필름과 그 아래 놓인 인화지 사이의 공간이 어떻게 각각의 이미지에 개입하고 변수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가상적 깊이감에 대한 실험은 〈Tilt〉(2015-2016)나 〈Color Index〉(2015) 시리즈로도 이어진다. 〈Tilt〉 시리즈는 작가는 동일한 사진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인쇄와 암실에서의 흑백인화 프로세스(젤라틴 실버 프린트) 작업을 통해 실크스크린 판을 기울여 에어브러쉬를 분사한다거나 암실에서 인화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변화를 주어 프린트하고, 이를 방향과 기울기에 따라 각기 다른 각도로 바닥에 설치한다. 이를 통해 사진 이미지 자체의 깊이감과 틸트 인쇄를 통해 만들어진 두 가지의 깊이감이 중첩되지만, 이들은 명확히 구별될 수 없는 상태로 남으면서 평면과 평면, 그러니까 이미지와 지지체 사이에 마치 진공상태 내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돼온 공간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러한 작업-실험은 암실 프로세스나 실크스크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지체로 확장/변주된다.  〈Color Index〉 시리즈는 13인치 노트북 액정화면에 256개의 색상들을 하나씩 화면에 띄우고, 이를 노트북 액정을 3가지 각도로 기울여 촬영한 작업으로 여기서 노트북의 액정화면은 암실에서의 필름이자 확대기로 기능한다. 768개(256x3)의 이미지는 퍼스펙티브가 제거되고 동일한 사이즈로 규격화돼 액정화면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른 색상의 변화를 시각화한다. 기준이 되는 이미지는 256개의 색상 파일이지만, 액정화면과 이를 바라보는 눈(또는 카메라)의 시점 사이의 깊이와 각도에 따른 변화를 보여주면서 하나의 이미지가 그것과 지지체 사이의 공간에 의해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 시각화한다. 이는 또한 우리의 시각이 이를 스스로 어떻게 보정하거나 착각해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Check and Stripe〉 시리즈에 선행됐던 〈Surface〉(2016) 시리즈는 지지체를 캔버스-물감으로 상정한다. 격자 패턴을 기울여 우레탄 페인트로 두께감을 만든 후, 에어브러시로 아크릴 물감을 같은 형태로 분사해 겹쳐내면서 지지체(우레탄 페인트 부분) 자체의 질감, 요철과 그 위에 포개진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짚는다. 이는 이미지-지지체-관람자의 시점이 일직선이 되는 정면 또는 (이를 다시 촬영한)도판 이미지에서는 얼핏 미묘하게 격자가 어긋난 두 레이어가  겹쳐진 이미지로 보이지만, 이를 좀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지지체 자체의 물리적인 패턴과 아크릴 물감으로 분사된 패턴이 분리되면서 이미지와 지지체 사이에 환영적인 틈을 만들어낸다. 이같은 틈을 만드는 작업은 〈Trade-off〉(2017) 시리즈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구현되는데, 암실 프로세스에서 적용할 수 있는 변수들을 분화시켜 프린트한 48장의 이미지를 격자로 배치한 이 작업에서 48장의 사진은 격자로 배치되며 하나의 레이어로 놓이지만, 이는 각각의 변수(노광시간, 스케일, 초점거리)를 통해 시각적인 차원에서의 틈 뿐만 아니라 노광시간을 통해 시간적인 격차까지 (다른 사진과 비교를 거쳐)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 다룬 오연진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픽셀 단위로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다소 극단적인 차원에서) 포토샵으로도 유사한 형태를 구현할 수 있지만, 이는 광/화학적인 인과관계로 도출된 것이기보다는 결과값만을 시각화한 목업(Mock-up) 이미지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까지) 작가가 굳이 암실 프로세스를 주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이는 단순히 초기 사진가들이나 과거의 사진가들이 해왔던 작업을 스스로 실습하거나 암실 프로세스 자체에서 오는 흥미로움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포토샵과 디지털 이미지가 기본값으로 전제된 현재의 시점에서 또다시 분화된 사진의 지지체와 시각성을 살펴보고 이를 직접 실험하는 과정에 가깝다. 사진술로서의 암실 프로세스와 포토샵은 하나의 시각체계-프로그램이라는 맥락에서 얼핏 비슷해 보이고, 더욱이 포토샵은 암실 프로세스에서 가능한 기능을 모두 포괄하며 아날로그 사진술을 대체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포토샵에서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 순서나 과정보다는 최종적으로 이것이 jpg와 같은 확장자로 내보내질 때의 이미지가 중심이 된다. 모든 과정과 결과값이 실시간으로 화면에 반영되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기능 안에서) 모든 변수는 사용자에 의해 통제되고, 그 과정에 인과관계나 자연의 법칙이 개입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암실은 마치 수학 문제를 풀거나 요리를 하는 것처럼, 주어진 조건 사이에서 어떤 값을 대입하고, 어떤 변수를 만들어내거나 없애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고 이는 사용자의 의도에 부합할 수도,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포토샵은 기능적인 면에서 암실에서 가능한 범주 이상의 것을 수행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에 선행하진 못한다. 자신의 지지체인 액정화면 자체의 한계로서 이미지와 지지체 사이에 공간이 전혀 확보될 수 없고, 비록 이를 시각적인 트릭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사이의 거리는 0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기 때문이다. 포토샵이라는 프로그램 자체의 한계를 실험하는 게 아니고,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사진(술)을 둘러싼 시각적 현상들을 관측하고, 이를 실험하는 작업이라는 전제 하에서 작가에게 암실 프로세스는 단순히 쇠퇴한 과거의 기술에 머물지 않는다. 

제프리 배첸(Geoffery Batchen)은 『사진의 고고학』의 결론부 ‘사진의 죽음’에서 “사진은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회귀하여 출몰하는 하나의 논리일지 모른다. 사진은 자기 자신의 ‘영매(Medium)’인 것*”이라 말한다. 사진의 정체성이 단일한 어떤 것이라거나 무언가로 환원되는 것이기 보다는, ‘확정되지 못한 것’으로서 유예되는 복합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연진의 주된 매체는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사진’이 아니라 하나의 시각체계로서의 ‘사진술’에 가깝다. 이들은 사진이면서도 사진이 아니고 사진이 아니면서도 사진인 (비가 오는 곳과 오지 않는 곳의 경계지대 같은) 그 모호한 영역에 위치한다. 작가는 사진이 ‘무엇’인지 규정하려 하기 보다는 그 자체를 실험도구로 활용하며 평면 이미지에서의 시각성 자체를 자신의 연구범위로 둔다. 그렇기에 오연진의 작업을 두고, 사진과 사진이 아닌 무엇을 분류하려는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고, 혹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별로 유의미한 행위는 아닐 것이다. 작가가 스스로 말했듯, “‘이것이 사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순간조차도 비-사진은 사진이 되기**” 때문이다.

* 제프리 배첸, 김인 역, ‘사진의 고고학’, 이매진, 2006, 260p.
** 오연진 작가노트 ‘사진, 매체, 조건, 클리셰’에서 발췌